진보의 틀, 그리고 연대 단체

얼마전에 진보라는 정체성에 관해서 댓글로 아카사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사실 그 뒤에 댓글을 이어 달고 싶었지만 시험기간에 맞물리면서 어영부영됐고... 그 때 이야기에서 내 의견을 다시 정리하자면 여전히 나는 진보라는 정체성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그 때 들었던 이야기가 분명한건, 진보라는 말이 굉장히 애매한 표현이라는 거였다. 어디까지가 진보인가? 누구까지를, 어떤 성향을 진보라고 부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진보와 보수를 정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표현 역시도 일리가 있다. 크게는 NL(민족주의)과 PD(사회주의?), 그리고 그 안에서도 여성주의, 평등주의, 노동자주의 등 셀 수 없이 크게 분류될 수 있다고 본다. 거기에 어느 정도의 성향이냐, 그러니까 나처럼 약한 수준의, 중도에 가까운 진보냐(근데 내가 중도에 가까운 진보가 맞긴 한가?),아니면 극좌쪽이냐에 따라 다시 한 번 갈릴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사실 그 사람들 사이에 가치관 공유는 크지 않다. 사실 처음에 나는 진보라는 하나의 그룹이 최소한도의 수준에서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진보진영이 공유하고 있는 거라면 '바꿔야한다'는 생각 정도다. 사회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그 수단으로 조금은 급진적이더라도 변화를 선택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 상의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들 모두는 진보를 표방하겠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주로 한 분야에 국한되어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연대할 뿐이다. 그건 맞는 말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몇 개의 연대단체에 들어갔고(정말 우연찮게 들어갔고 우연찮게 활동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활동하면서 느낀건, 연대단체가 나의 모든 가치관과 합치될 수는 없다는 거다. 예컨대 우리 학교의 연대 단체 중 내가 알고 있는 연대단체는 여성주의학생회, 퀴어자치연대, 청소노동자연대, 그리고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으니 아예 이름으로 말해야할 것 같은 '신촌서강 알바연대', 그리고 생활도서관 단비 등 5개다.


이 모두가 나의 가치관과 합치될 수는 없다. 사실 내가 참여자의 눈으로든, 제3자의 눈으로든(중간부터 운동권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진 탓에 거의 제3자에 가까운 존재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의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연합한 것이고 연대한 것이지 그들의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은 아니다. 예컨대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꼭 퀴어에 관대하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사실 그건 연대단체에 들어와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연대단체를 이끌어가는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의 연대단체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자꾸 마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그리고 사실 연대한다는 것에서 최소한 '너희가 믿는 그 가치관이 옳은 것이라고 나도 믿는다'라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어른들의 사정'에 의해서 일시적인 연대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학교 내 연대단체가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진보'라고하는 이름의 가치관은 그런 식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진보라는 범주 속에 있는 모두가 딱히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들의 연대, 그리고 진보라는 그룹의 형성은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기도, 그들의 가치관이 부분적인 공유가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진보진영이라고 불리는 축에 서있는 사람들을 볼 기회도, 보수진영이라고 불리는 축에 서있는 사람들을 볼 기회도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우리 학교에서 어쩌다보니 알게 된 연대단체 사람들이 다일까? 물론 내가 위에서 언급한 연대단체들의 성향도 극과 극이다. 물론 퀴어자치연대와는 내가 전혀 접촉한 적이 없어서 그들의 성향을 알 수는 없지만, 예컨대 신촌서강 알바연대의 경우 굳이 따지자면 훨씬 왼쪽에 심하게 가있는 단체다. 사실 내가 연대(청소노동자연대)에 가입하게 되는 시점에서 나는 연대의 의미도, 어떤 활동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들어갔기 때문에 처음엔 굉장히 당혹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연대단체에 속해서 다른 가치관의 연대단체와 자주 접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뼈저리게 느꼈던건 위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모든 연대의 가치가 나와 부합될 수는 없다.'라는 것. 사실 이건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아카사님과 이야기할 때는 여기까지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 어쨌든 나는 극좌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아니고, 급진적인 변화, 혁명만을 찾는 사람도 아니다. 회색분자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보수측의 점진적인 개혁이 정말로 점진적으로라도 진행만 된다면 급진적인 변화보다 옳은 경우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뭐 그런 어정쩡한 가치관에 있는 사람이니까. 진보라는 이름으로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관을 억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들을 공부해보는 것은 소중한 기회다. 그렇게해서 그런 가치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가치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게 내가 보수를 이해해보려고 했던 일이기도 하고.


사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러한 단어들이 모두 애매한 범주의 사람들을 묶어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론상의 진보, 보수와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하는 자칭 진보, 보수들 사이에도 분명한 간극이 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보와 보수 내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결국 그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진보와 보수라는 틀을 인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도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일터다. 나는 여전히 진보와 보수의 틀 자체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나 자신도 진보와 보수의 엄격한 구분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 분명히 일리있는 말이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를 떠나서 요즘 자꾸 되새기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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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

      • 세르엘님이 이해하고자 하는 보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보수라는 애매한 개념보다는 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접근하는게 옳지 않나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세르엘님이 보수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라던가, 단체같은 식으로요.

      • 그리고 제가 보수를 이해하려고 하는건 정말로 보수 그 자체에요. 조금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저들을 꼭 이해해야겠다, 하는 생각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보수는 제가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일부를,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모호하게 묶은 것이고요. 꼭 보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反퀴어, 反여성주의같은, 진보진영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거나, 어쨌든 그런, 제 이해의 범주에서 벗어나있는 사람들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하고 싶다.. 정도죠.

        사실 보수라는 사상 전반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싶은건 사실이에요. 역사적으로 변화해온 과정에서 상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보수 말고, 근대 자본주의 확립 이후 보수세력을 형성해온 '그들'이요. 그리고 그들과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근대 한국에서 보수권력을 형성해온 사람들.

        사실 이런것도 한 때 일이고, 요즘은 국제정치학 쪽으로 관심이 넘어가버려서 보수와 진보에 관한 논쟁은 뭔가 철지난 이야기같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국내 현실정치에 대한 관심을 접지 않는한 중요한 화두임은 분명하죠. 아직은 너무 지식이 짧아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국제정치학 관련해서 읽고 있는 책을 끝내면, 이쪽으로도 책을 몇 권 읽어볼까 하는데(마땅히 지식을 쌓을만한 곳이 책 밖에 없는게 현실이라) 어찌될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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