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엠 아이(Who Am I)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인데, 나는 문과를 왔고 이과에는 전혀 소질도 없고 과학에도 영 관심이 없지만, IT나 컴퓨터에 대한 알 수없는 동경과 로망을 가지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그런 분야 중에 하나인데, 그러다보니 당연히 해킹에 관심'만' 있다.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지식은 전혀 없으니 이건 일종의 허세같은 거다. 좋아하는 이유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줄거리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고 비교적 단순하다. 주인공인 벤야민이 'CLAY'라는 해킹 집단을 만들어서 여러 기관의 웹사이트, 서버 따위를 털고 다니면서 MRX라는 익명의 해커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독일 연방정보국(BND; 베옌데)에서 진술을 하고 있는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된다. 


독일연방정보국 로고.


영화의 거의 대부분(거의 80분 정도)의 시간동안 벤야민이 자신이 어떻게 CLAY에 가입했고, 어떤 활동을 했으며, 어떻게 위기에 처하게 됐고 자신이 왜 BND에 방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영화를 굳이 나누자면 90분 정도의 앞 부분과 그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텐데, 앞부분의 경우에는 CLAY의 활동내용이 소개되는 부분이고 뒷부분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반전에 관한 부분이다. 


사실 구조만을 따지고 보자면 앞선, 장장 90분에 달하는 CLAY의 활동에 대한 서술은 사실 마지막 반전을 위한 밑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반전이라기 보다는 그 앞부분이다. 내 흥미를 끈 것도, 이 영화에서 진짜 재밌게 본 부분도 그 부분이었다. 사실 반전에 부딪히기 전까지 이런 반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용된 반전 자체도 비교적 흔한 장치이고, 그걸 다시 뒤집는 것도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이야기였다. 놀라운 반전이 있는 영화 혹은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 영화라기 보다는, 그런 반전 자체를 즐기면서 그러한 반전이 늘어놓아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평가

영화 자체는 아주 나쁘지도 아주 좋지도 않다. 100분 남짓의 러닝타임 자체가 아주 길지 않아서 사실 크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앞부분의 서술 자체가 반전을 위한 밑밥 깔기이다보니 결말을 보면 조금 허망할 수도 있지만, 사실 CLAY가 이런 활동을 했습니다! 하고 반전 없이, 이야기를 좀 더 다듬어서 그리고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끝! 하고 결말을 내도(그러니까 나우 유 씨미처럼) 사실 크게 문제될 것 없는, 그런 영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수작의 선을 뛰어넘지는 못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플롯이 그 자체의 이야기가 나름 봐줄만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가지고 있는 강점은 사실 반전과 반전의 반전(이중 반전?)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CLAY의 활동에 대한 묘사를 지나치게 많이 할애함으로써 반전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반전을 풀어놓는 것도 허술한 느낌을 남긴다. 물론 그것은 이 영화에서 반전 자체로 늘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렇게 마지막에 짠! 하고 공개되는 반전이라고 하기에는 반전이 생각보다 충격적이지 못했다. 즉, 관객으로서는 임팩트 없는 반전이 "뭐야, 그런 이야기였잖아.."하는 미묘한 감정을 느낄 뿐 어떤 충격도 안겨주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영화가 상대적으로 개연성이 부족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동안 자신의 자리를 고고하게 지키던 MRX가 갑작스런 도발에 홀랑 넘어가서 갑자기 FBI에 잡혀 들어간다는 것 부터가 의문을 남긴다. 이러한 서사는 MRX를 뭔가 '해커 세계의 제왕'에서 '자존심 밖에 없는 멍청이'로 지나치게 빠르게 추락시킨다. 이는 MRX라는 존재의 필요성이 (작가에게)변화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앞에서는 CLAY를 형성하고 맥스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MRX는 강력한 영웅이어야했지만 후반부에서는 MRX가 잡혀들어가고 CLAY의 일원들이 안전하다는 해피엔딩을 위해 없어져야할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따라서 시나리오를 쓰는 입장에서 MRX는 빨리 치워버려야했다. 그러나 CLAY의 활동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할애했기 때문에 MRX를 합리적인 속도로 제거할 여유를 남겨두지 못했고, 결국 MRX는 쩌리 엑스트라가 되어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야기의 긴장감을 조성했던 것은 MRX이지 BND나 수사관인 한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를 통해 반전을 만들어야했기 때문에 MRX보다 더 핀트를 맞출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MRX의 검거 과정에 대한 묘사는 더욱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벤야민의 부모님에 대한 충분한 묘사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벤야민에 대한 장애 의혹을 개연성있게 연결하지 못했고, 둘째로 업무 평가가 나빠 결국 정직에 이르게 되는 한나에 대해 개연성있는 설명에 실패함으로써 조사관은 '감수성이 풍부한, 그리고 그럴만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간적이지만 이용당하는 수사관'이라는 비교적 정형화된 캐릭터의 형성조차도 실패하고,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위기에 처했는데 결국 벤야민을 봐주고 본인도 위기를 모면하는 수사관"이라는 특색없는 인물로 절하되고 만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상의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리인데, 마리는 맥스와 키스하고 그 다음날 바로 벤야민을 찾아오는 일관성없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영화가 형성하는 그녀의 이미지는 벤야민의 지지자에 가까워 관객으로 하여금 혼란을 준다. 마리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서는 어떠한 개연성을 찾아낼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러닝타임에서 분량 조절이 미흡했고, 이 때문에 포함되었어야할 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감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비교적 괜찮은 수작이다. 분량 조절 자체는 미흡했지만 해커로서 활동하는 CLAY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즉, 전반적으로 미흡한 스토리 구조나 분량조절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내용물로 커버한 영화인 셈이다. 영화의 분량 조절에 대해 반복적으로 지적했지만, 역시 앞서 평가한 것처럼 그렇게 영화가 아주 긴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지루함도 덜하기도 했다. 영화는 '결과'만 보여주고 그 '과정'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했고, 그것을 관객들이 스스로 풀어나가야할 정도로 매력적인 결말 혹은 충분한 단서를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화의 비장의 무기였던 반전은 충분히 상상가능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LAY가 만들어지고 그들이 활동하는 모습은 그들이 범죄자인 것을 알면서도 관객들이 그들을 응원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해피엔딩을 바라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제작자들은 나름 멋들어진 해피엔딩을 보여준다. 해킹을 다룬 영화 치고는 비교적 화려한 연출과 해킹을 지하철로 표현해낸 것 등은 이러한 내용물을 더 잘 다듬어놓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면 더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도 있다.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다고 하니 이런 부분은 할리우드에 기대를 걸어보아야겠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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