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슬란 전기 2. 두 왕자(왕자이인)

 

아르슬란 전기 2. 두 왕자(王子二人)

 

들어가며

   어느새 2권도 끝. 아르슬란 6인방이 드디어 든든한 원군을 얻었다. 바흐만과 키슈바드와 합류한 아르슬란에게는 이제 탄탄대로가 열릴 것 같지만, 1부만 해도 7권까지인데 이제야 2권이니 아마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 풀릴리는 없으리라. 이번 편에서도 아르슬란과 함께 하는 이들은 강력하다. 나르사스의 지략, 다륜의 무용은 물론이고 기이브, 파랑기스, 심지어 엘람이나 아르슬란까지도 손에 꼽힐만한 무용을 자랑하고 있다. 말 그대로 영웅담같은 이야기다. 절대 패전하지 않는다. 패전에 가까운 무언가에서도 이들은 성장한다. 패전한다기 보다는 성장의 계기를 만들 뿐이다. 그런 이야기의 연속. 아직 질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아직까지는 통쾌한 느낌까지도 든다.

 

정교분리와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의 베이스모델을 십자군으로 잡았다는 이야기를, 전권 후기에서 얼핏 본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루시타니아는 정치와 종교가 이리저리 뒤얽혀있는 나라다. 중세시대 유럽국가들의 그것이다. 왕권은 교황권을 넘어서지 못하고, 교황은 왕을 존중하는듯 하지만 그들 위에서 놀며, 오히려 그들을 압박하고 그들의 정당성을 위협한다. 종교가 나라의 중심이 되었을 때, 왕의 정당성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정교분리의 필요성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종교와 정치는 경제와 정치만큼이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금권분리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합리성의 시대,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점증하는 객관화'와 '세계의 전반적인 합리화' 과정 속에서 종교는 정치로부터 떨어져나갔다. 조금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처음, 중앙집권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종교가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후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왕권을 추월하여 왕권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루시타니아는 정교일치 국가에서 정교분리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모양새를 그대로 드러낸다. 제사장인 보댕은 일종의 교황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신의 군대(템페레시온스)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왕이 아닌 보댕의 말을 따른다. 한 나라의 국교 정도가 아니라, 그 나라의 뿌리 그 자체다. 정치 위에 종교가 올라섰을 때의 문제는 거기에 있다. 정치의 기본에는 항상 합리성이 있어야한다. 감성에 호소할 일이 있고, 그러한 감성에 호응해주어야할 일이 있더라도, 그 근본은 합리성이 차지해야한다. 그러나 종교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종교는 비이성적이며 열성적이다. 그러한 열성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할지는 몰라도, 정치에 적합한 형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한 종교가 정치 위로 올라서는 순간,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루시타니아라는 국가는, 그렇게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히르메스는 그것을 파고들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파르스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주인공, 아르슬란이 되찾으려고 하는 나라, 파르스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라의 총력을 모아 루시타니아에 저항해도 모자랄 판에, 은가면(히르메스)이 끼어들면서 상황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우리도 일상 속에ㅐ서 쉬이 보는 장면이다. 더 큰 외적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치지는 못하고, 스스로 분열하고 스스로의 이권에 목매다가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상황들. 지금 파르스가 겪고 있는 상황이 딱 그런 상황이다.

 

   히르메스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에게는 진정한 파르스 왕가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고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그는 외적의 편에 섰다. 수많은 자신의 국민을 죽였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그에게는 이미 통치의 정당성이 일절 남아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이름, 그의 혈통만으로 수많은 파르스의 장수들은 흔들린다. 비합리적인 정통성의 확보. 그것은 일종의 비이성적 카리스마의 확보 과정이다. 그는 스스로 정통성을 잃었지만, 그렇게 상실한 정통성을 소수의 신하들을 통해 다시 얻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스스로는 결국 다시 루시타니아를 몰아내겠다고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의 민심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루시타니아의 왕과 왕제, 그리고 파르스의 두 왕태자는 흥미로운 구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타당한 왕, 혁신과 혁명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왕은 단연 아르슬란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주인공이 되었으리라. 그의 사촌이 되는 히르메스는 전형적인 구체제의 왕이다. 국가와 국민 위에 자신의 왕권과 왕위를 두는 과거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통치자다. 아니, 정확히는 통치자가 아니라 지배자다. 루시타니아의 둘은 무능한 왕과 그의 배후에서 실제로 나라를 움직이는 왕제의 모습을 그려내고, 그 사이에 보댕이라는 종교적인 존재를 끼워넣음으로써 루시타니아의 복잡한 정세를 내비친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꽤나 흥미로운 구도다. 과연 아르슬란은 자신의 나라를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정말 '자신의' 나라일까. 먼치킨적인 구성이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작가의 명성답게 흥미로운 구도로 이야기를 잘 이끌어가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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