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집착과 욕심 - 샤프펜슬에 관하여

여러번 밝힌 적이 있지만 나는 성미가 무척 급하다. 무언가 잘 흘러갈 때는 되게 깊이 빠졌다가, 일단 탁 막히고 나면 금방 흥미를 잃는다. 깊이 빠지지만 헤어나오는 속도도 그만큼 빠르다. 여러가지 게임을 해도 오랫동안 하지 못하고 다시 나와버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실제로 무언가를 진득하게 배워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런 기질이 나타나기 때문에 썩 좋은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뭐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결국 목표했던 만큼 성적을 올리진 못했지만 어쨌든 재수까지 해가면서라도 나름 이름있는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건 엄청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흥미를 잃고 탈선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뭐 그런 느낌.


갑자기 이런 글을 쓰게 된 건 샤프펜슬 때문이다. 내가 샤프펜슬에 집착하기 시작한건 초등학교 때부터고, 본격적으로 돈을 쓰기 시작한건 중1때부터다. 샤프펜슬을 좋아했던게 정확히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만원에 근접한(당시 엔화는 쌌었으니까. 지금은 그 때 샀던 샤프 모두 만원을 훌쩍 넘는다) 샤프를 샀던건 중학교 1학년 때부터가 맞다. 그 때만 하더라도 이 샤프 저 샤프 다 사서 다 써보고 싶었고, 부모님 몰래 그렇게 샤프를 사는데 열심히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는돈 없는돈 탈탈 털어가면서 샤프를 샀으니, 내가 샀고 아직까지도 샤프펜슬을 좋아하고 있지만 참 그런 돈낭비가 없었구나... 싶다. 결국 이런 식으로 샤프를 사는건 중학교 때 피크를 찍고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꾸준하게 조금씩 샀던 것 같다. 덕분에 집에 샤프가 넘쳐나고. 사실 잃어버린 샤프까지 다하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샤프를 사들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열심히 눈팅했던 네이버 카페가 두 개 있었는데, 그 카페에서 샤프들을 사 모으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별 것 아니라는걸 금방 깨닫게 되지만(나랑 돈을 쏟아붓는 스케일이 다르다), 다행히 거기에 질투심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잠깐 펜텔 메카니카 샤프가 가지고 싶었던 때를 제외하면 단종된 샤프를 구해보겠다고 돈을 써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메카니카 샤프도 살까말까 많이 고민하다가 결국 안샀었고. 그땐 유난히 그런 샤프를 좋아했던 것 같다. 단종되기 전에 샀던 HHP-300S나 메카니카같은, 좀 '있어보이는' 샤프. 또는 알파겔이나 펜텔 에르고노믹스처럼 뭔가 좀 특이한 샤프. 그랬던 취향이 고등학교 즈음부터 변해서 그 때부턴 본격적으로 그래프1000에 엄청 집착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지금까지 여러가지 샤프를 써봤지만, 결국 항상 그래프1000으로 돌아오길래 아, 그래, 이 샤프가 딱 내 샤프인 모양이다.. 뭐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한 샤프를 집착하게 됐다고 해서 돈을 덜 쓰진 않았고 리미티드 세 자루에 그냥 그래프천만 5자루 넘게 사들였다. 0.3mm, 0.4mm, 0.5mm 이것저것 써보다가 지금은 0.5mm만 열심히 쓰고 있고.


재수 때까지만 해도 내가 부족했던 수리 영역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샤프펜슬을 엄청 썼었다. 현역 때 쓰던 샤프는 0.3mm였는데 처음엔 그 날카로운 맛이 좋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너무 날카롭다.. 뭐 그런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아직 애들이랑 말도 트지 않았던 시절, 혼자서 학원 앞에 있는 모닝글로리(영수증에는 모닝글로리 대치휘문점이라고 찍힌다)에 가서 0.5mm짜리 그래프천을 샀다. 그리고 사실 현역 3년보다 더 인상깊었던 재수생활인 만큼 이 샤프는 여러모로 애지중지하면서 쓰고 있고. 그랬던 샤프인데 역시 수능이 끝나고 나니 쓸 데가 없었다. 내가 샤프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무언가를 적을 때 샤프를 쓰는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 샤프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지울 수 있는' 필기구를 원래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예컨대 펜이라도 시그노 이레이져블같은 녀석들은 신기하긴 해도 잘 쓰지는 않았다. 수능이 끝난 이후로 내가 펜을 쓰는 것이라곤 플래너나 수첩 정도였는데 플래너나 수첩엔 샤프로는 손도 대지 않는게 원칙처럼 되있어서 샤프를 한 달 정도 놨었다.


그러다가 지금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12월 6일이니까 수능 끝나고 대략 1달 정도 뒤다), 다시 수학을 하는 입장이 되면서 샤프를 열심히 쓰게 됐는데...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 요즘은 애들이 이런 샤프는 다들 가볍게 하나씩 들고 다니는구나. 나만 해도 거의 반에 한 명 있을까 말까였는데.. 나 때는 순천까지 물건이 안내려왔던건지 정식 수입이 안됐었던 건지 펜텔 샤프 중에 수입되는건 P20x나 PGx 정도였고 그래프천같은 샤프는 아예 볼 수가 없었는데, 요즘은 그래프천이 되게 흔해졌구나, 싶었다. 그리고 또 내가 어느 순간부터 필기구에 관심을 뚝 끊고 살았다는 점에 놀라기도 했다.


그랬다. 재수 시작 이후로 샤프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시그노나 열심히 사들였고 이것도 굉장히 실용적으로(...)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에 내가 국사 정리할 때 색깔이 하나 더 필요해서 골랐던 만다린 오렌지 정도 열심히 썼었고 나머지 필기구는 그냥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학교다니던 시절에 왜 그렇게 돈을 썼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알면서 샀던 것 같다. 그 때도 카페에 여러번 글이 올라왔었다. 요지를 좀 많이 압축해서 표현해보자면 니들이 산 샤프 갯수만큼 후회하게 될거다라는 내용의 글. 물론 카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그런 글은 금방 묻혀버렸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분명 그럴거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뒤로도 샤프는 열심히 샀다. 멋들어지게 표현하자면 그런 미래 따위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 돈을 쏟아부었다고할까..(돈을 쏟아붓는다고 표현해두니까 멋들어지지를 않는구나)


뭐 샤프 이야기를 하려고 썼던 글이 맞는데, 사실 샤프만 그런건 아니다. 내 성격이 원래 그래서 흥미가 너무 급하게 뚝뚝 끊긴다. 그리고 항상 흥미가 없어지고 나면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여기에 돈을 얼마나 썼는데... 와 돈 아깝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러지 않을까. 요즘은 또 플래너에 돈을 되게 많이 썼다. 또 기타에도.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면 이걸 가지고 앞서 말했던, 그런 일종의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지만, 나 자신도 모르겠다. 언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지. 그래도 생각해보면 나름 괜찮지 않을까. 어쨌든 내가 커버할 수 있는 금액 이상을 쏟아붓지는 않았고, 그런 한도를 지키면서 그 당시 그걸로 즐거워했으니까. 중2병틱하게 말해보자면 그렇게 즐거웠던 나 자신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뭐 그런 느낌일까? 아니 부정이란 표현이 원래 이렇게 오글오글했던 단어였나.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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