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 우리에겐 '분노할 의무'가 있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처음 받아들면, 아마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이게 책이야?"라는 생각일 겁니다. <분노하라>는 전체 88쪽의 '책자'입니다. 거기서 조국 교수님의 추천사나 역자와 저자의 인터뷰 등을 제외하자면, 9쪽에서부터 머리말이 시작하고, 43쪽에 각주 페이지가 끝이나는, 아주 얇은 책입니다. 책은 정말로 굉장히 얇고, 이 안에 도대체 무슨 건질만한 내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통렬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분노하라!". 사실 이 책은, 얇은 것 이상으로, 그 핵심을 제목에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정치계, 경제계, 지성계의 책임자들과 사회 구성원 전체는 맡은 바 사명을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되며, 우리 사회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독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강물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조국 교수님께서 추천사에서 언급했듯이, "분노는 삭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혜가 널리 퍼져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나요, 우리 사회는 분노의 표출을 극도로 억압하는, 상당히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보수성은 또다른 진보를 완전히 억누르는 큰 요소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는 진보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요? 새롭지 못하다, 진보가 진보답지 못하다, 진보가 보수적이다라는 거센 비난을 던지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그러다 실패하면 어쩔거냐, 책임질거냐같은 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사회는, 그렇게 진보를 진보답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스테판 에셀의 책은, 그러나 비단 진보에만 국한될 일은 아닙니다. 스테판 에셀이 주장하는 것은 거창한 정치적 이념이 아닙니다. 스테판 에셀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분노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노할 의무가 있는 것은 비단 진보 성향의 사람들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서민이라면, 그리고 이 나라가 서민을 핍박한다면, 마땅히 '분노'해야합니다. 부당한 권력, 부당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분노, 그것 역시도 마땅한 의무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 정도만 분노하면 되나요? 우리는 그저 우리를 위해 분노하면 되는 걸까요?


스테판 에셀은 거기에 대해 NO라고(독일 태생 프랑스 분이지만..orz) 말합니다. 그의 분노는 개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두 가지, 현대 사회에 마땅히 분노해야하는 대상은, 점점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즉 양극화)와 인권, 그리고 현재 지구의 상태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이 말이 시사하는 것은, 제 나름대로 이름붙여보건대, 이 사회가 한 발짝 더 "진보"[각주:1]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분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분노해야할 것을 보고, 그것을 외면하는 일이 잦습니다. 어떤 정권이 정책에 실패하더라도,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법률에는 낼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면서 정작 민생 법안에 대해서는 나라가 망한다느니 예산이 어쩐다느니 하면서 통과를 시키더라도, 어느 공장에서 누가 죽어가면서 산재 인정을 못받더라도,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할 '복지권'인 연금이 축소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정치적 이념에 무관하게 어떤 정당이 누구를 공천하고, 공천받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기에 분노하는 이보다 외면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나 한 명으로 뭐가 되겠어, 하는 심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분노가 가져다 줄 이익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보 집권 플랜>에서 진보의 과제로 뽑았던 것 중 하나가 "유능한 진보"가 되어라, "진보의 능력"을 보여줘라, 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진보를 뽑아서, 진보를 내세워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진보가 그걸 보여주지 못했다는 소리였죠. 이건 스테판 에셀의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분노를 터트리고, 그로서 어떠한 과실을 얻어본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민주화"라는 말이 장난스럽게 사용되고, 민주화 운동들을 단순히 '반골적 기질' 정도로 평가하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러는 동안 "분노의 유능함"을 잊어버렸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최근의 분노는 조금 변질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가까운 예로 4.11 총선을 살펴볼까요. 왜 민통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김용민의 욕설에 분노하지 않으면서 문대성의 논문 표절에 분노했습니까? 왜 새누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문대성의 논문 표절에는 분노하지 않으면서 김용민의 욕설에는 분노했습니까? 분노의 본질은 '정치적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는 분노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며, 정치적인 편향성을 띄어서는 안됩니다. 분노가 정치적일 수는 있습니다. 아니, 분노느 정치적인 데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생활은, 우리가 체감하는 것 이상으로 분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 편에겐 분노하지 않아, 너네편은 왜 그래? 하면서 분노하는 '편향성'은 있어선 안될 일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분노해야하는가? 저자가 '늙은 노투사', 즉 레지스탕스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면, "혹시 이거 위험한 책 아니냐"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만, 단언컨대 아닙니다. 저자는 "평화적 봉기"를 요구합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돌을 들어라, 그리고 그 돌을 던져라, 하는 내용이었다면, 저라도 조금 꺼려지긴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요지는 그게 아니거든요. 스테판 에셀의 본문 만을 가지고 보면, 이 평화적 봉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헷갈릴 여지도 조금 있습니다. 조국 교수님의 추천사에 실린 내용으로 글을 보죠.


그렇다. 이젠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에 맞서서 "평화적 봉기"를 일으킬 때다. 이 '평화적 봉기'의 수단은 다름아니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각종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자. 온라인에서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하자. 단호하게 그리고 발랄하게. 또한 무조건 투표하자. 투표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찬동자"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현재의 상태를 묵인, 방조하겠다는 의사의 다른 표현이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어려운 일이 아닌게 아니라, '당연한 일'을 하는 거죠. 이 책이 말하는 '분노'는, 그래서 저자의 말대로 분노할 '의무'가 됩니다. 왜 투표를 해야하냐구요? 투표는 '분노할 의무'를 가장 합법적으로 발산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4.11 총선 이후로 트위터같은 곳에서 큰 논란이 일었던 문제가 소위 말하는 '20대 개*끼론'이었어요. 진보진영의 패배는 청년의 투표율이 낮아서다, 라는 말이죠. 이 자체는 잘못된 말이지만, 이 과정에서 투표하지 않은 사람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하지 말라는 일부의 의견이 나왔죠. 동의합니다. 투표하지 않았더라도 이 사회를 비판할 자격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까요. 과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요? 그건, 분명히 비판할 자격은 있지만, 조금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요. 맞습니다, 선거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오라는 법은 없죠. 대개의 정권은, 겉으로만이든 아니든 간에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때 국민들의 선출을 받은 셈이죠. 그렇다면, 그 때 투표 한 사람이 옳은가요, 투표하지 않은 사람이 옳은가요? 예컨대 투표율 50%인 선거에서 우리가 우리 손으로 독재자를 뽑았다면, 투표한 사람이 그 사람을 뽑은게 잘못인가요? 아니면 50%의 권리를 포기한 채로 그에게 정권이 가게 만든 게 잘못인가요? 투표를 하고 안하고는 개인의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선택 중에서도 '하는게 권장되는' 선택이라는 점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상당히 정치적인 이야기로 만히 흐른 것 같지만, 뭐 괜찮겠죠? 애초에 이 책이 정치와 떼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P.S.)

이번에 일부 보수성향 트위터리안들의 입에서 투표율과 관련된 충격적인 말들이 꽤 많이 쏟아져나왔습니다(투표율과 별개로 충격적인 말이 쏟아져나온건 진보고 보수고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투표율이 높은게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같은 말들이었죠. 그런 사람들의 말에는 대개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 즉 근거가 빠져있었습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부디 그 근거 좀 댓글로 일러주세요. 마땅한 말이라면 듣고 배우겠습니다.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1.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진보가 아닌, 발전의 의미로서의 진보 [본문으로]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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